올해 처음 모종을 낸 무
페이지 정보
작성자 sans339 댓글0건 조회 7회 작성일 2025-10-26본문
부재중자동문자
올해 처음 모종을 낸 무가 텃밭에서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더위로 힘겨웠던 여름은 갔다. 주말농장엔 가을이 완연하다. 무와 배추는 쑥쑥 자라고, 갈무리할 작물도 여럿이다. 때맞춰 내년 봄 수확할 마늘과 양파도 심어야 한다. 참, 월동 시금치도 씨를 뿌려야지. 밭으로 향할 땐 마음이 바쁜데, 일단 도착하면 싱숭생숭해진다. 텃밭 가득 작물이 빼곡한데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든다. 계절 탓인가, 나이 탓인가?배추도 무도 성공인데 상추가 걱정이네추석을 전후로 비가 많이 내렸다. 처음엔 내심 반겼다. 이즈음 배추는 물을 많이 먹는다. 물이 충분해야 속이 찬다. 반가운 마음은 금세 걱정으로 바뀌었다. 비가 와도 너무 온 탓이다. 비를 피해 찾아간 텃밭은 축축했다. 군데군데 물이 고였고, 흙도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장화 신은 발이 밭에 쑥쑥 빠졌다.다행히 배추는 무탈했다. 천연살충제 제충국을 몇 차례 뿌려준 뒤 좁은가슴잎벌레의 활동성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사이 영양제(복합비료) 덕분인지 배추가 빠르게 자랐다. 이제 제법 속이 차기 시작한다. 진딧물만 피하면 올가을 배추농사는 성공작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아무렴 늦더위와 해충 탓에 알배추 수준이었던 지난해만 못할까?무도 잘 자랐다. 종자 대신 모종을 택한 게 ‘신의 한 수’였다. 큰 놈은 벌써 담뱃갑만 해졌다. 시리도록 초록인 무청도 풍성하다. 텃밭 농사 초기엔 겨울이면 옷걸이에 주렁주렁 무청을 걸어 베란다에서 시래기로 말렸다. 몇 년 전부터 김장농사가 초라해지면서 한동안 시래기는 구경도 못했다. 무청 사진을 본 아내가 “간만에 시래기 좀 말릴 수 있겠다”며 반긴다.비 피해가 막심한 건 상추다. 잎이 앙상해져 시름시름 앓는 모양새다. 원래 가을 상추는 봄 상추보다 잎이 두툼하다. 꺾으면 또각또각 소리가 날 정도다. 몇 차례 수확도 못했는데 철이 끝난 것 같다. 가을엔 툭하면 밭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날이 좋아도, 날이 좋지 않아도, 날이 그럭저럭해도 동무들과 둘러앉아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올핸 아직 한 번도 불을 피우지 못했다. 상추가 조금만 더 버텨주길 간절히 기원했다.콩은 병에라도 걸렸는지 일찌감치 잎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꼬투리도 몇 달리지 않은 채다. 팥은 올해도 종자는 건질 것 같다. 밭장 선친께서 남기신 종자를 해마다 뿌리고 거둔다. 고구 순이의집 지하1층에 있는 쪽방. 박병국 기자 [헤럴드경제=박병국 기자] “3평의 공간에 4~5명이 같이 잤어요. 이들이 일하러 가면 그만큼의 여공이 들어와 잠을 잤습니다. 주·야간 합치면 10명이 넘는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순이의집 해설사)지난 23일 찾은 서울 금천구 노동자생활체험관 순이의집. ‘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던 구로공단 여공들, 그들이 살던 벌집촌(쪽방촌)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순이의 집’이다. 면적 약 20평(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공간이다.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쪽방 골목이 펼쳐진다. 패션방, 공부방, 미싱방 등 6개의 쪽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쪽방과 쪽방사이에는 공용 부엌도 있다. 설명을 맡은 순이의집의 김재형 해설사는 “1980년대 기준으로 쪽방촌의 월세는 13만원대, 여공의 월급은 5만9000원대였다”며 “주야간 교대로 살면 10명까지 사는데, 이 사람들이 월세를 나눠 냈다. 그리고 남는 돈으로 오빠와 동생의 학자금을 댔다”고 말했다. 금천구 노동자생활체험관 순이의집. 박병국 기자 ‘순이의 집’은 구로공단 노동자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70, 80년대 가발, 봉제 등 경공업 중심의 구로공단은 이제 대한민국의 IT·AI 산업의 메카가 됐다. 서울시 기자단이 유성훈 금천구청장과 함께 금천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둘러봤다.구로공단은 1964년 시행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라 조성됐다. 1967년 1단지를 시작으로 1968년 2단지, 1973년 3단지까지 차례로 만들어졌다. 섬유, 봉제, 가발 등이 구로공단에서 제조됐다.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은 과거 가리봉동 115일대 ‘벌집촌’에 터전을 잡았다. 벌집촌은 한 건물에 30개이상의 작은 방을 쪼개 만들고, 공용 화장실과 공용 부엌을 사용하는 형태의 집이다.“수출의 역군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2층에 영상기록실 스피커에서는 앳된 여공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속 여공은 앳돼 보였다.이 여성의 말처럼 이들은 산업 역군으로 일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부재중자동문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